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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들 16화] 박정희 그리고 ‘노동자’ I.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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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죽음을 택했던 22살의 피복공장 노동자.

우리는 그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기억합니다.

그가 분신하며 마지막으로 외쳤던 말,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일 평균 근무시간 15시간.
일당 커피 한 잔 값인 50원.
그가 그 말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당시 동대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상입니다.

이는 당시 박정희 정권이 내세웠던
‘선성장 후분배’ 경제발전의 이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합니다.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그날들>.

이번에는 경제성장을 앞세워
희생을 강요당했던 노동자들의 아픔에 집중했습니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노동자들의 실상을 세간에 알린
‘전태일 분신자살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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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작업공간

당시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작업장 모습입니다.

최대한 많은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약 3미터 높이의 공간을 2층으로 나눈 건데요.

결국, 재봉사가 들어가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은
1.5미터가 채 되지 않습니다.

허리조차 펼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한 공간에
제대로 된 창문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이 공간에 재봉사, 재단사, 보조원 등
무려 30여 명이 함께 일합니다.

그것도 하루에 무려 15시간 내지 18시간 동안
노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받는 월급은 1천5백 원.
일당이 당시 커피 한 잔 값인 5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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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 월급은 4~5년동안 오르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는데,
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을까요?

누구든 당시 상황이라면 갖게 되는 의문입니다.

전태일 열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965년 당시 17살이었던 그는 이 공간에서 일하며,
당시 노동자들의 처우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래서 열악한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어린 여공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2년 뒤, 재단사가 됩니다.

하지만 도움을 주는데 한계를 느끼던 차에
이듬해인 1968년 ‘근로기준법’을 접하게 되고,
이후 그의 삶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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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로기준법과 전태일

1953년 처음 제정된, 당시의 ‘근로기준법’입니다.

노동시간과 휴게시간이 명시돼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를 아는 이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이에 그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 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을 알리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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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업주들의 탄압으로 해고를 당해 평화시장을 떠났던 그는
1970년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회’를 만듭니다.

직접 설문조사를 벌여
당시 노동실태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를 만들어,
노동청과 감독관에게 끊임없이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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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배포된 설문지입니다.

휴일여부, 노동시간, 건강상태, 임금조건 등을
구체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이후, 언론에서는 노동자들의 실상을 최초로 알립니다.

1970년 10월 7일자 <경향신문> 7면입니다.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란 제목과 함께,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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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삼동회는 8개 요구조건을 적은 건의서를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에 제출합니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묵살하고, 정부는 이를 묵인합니다.

이에 삼동회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획합니다.

1970년 11월 13일.

시위는 미리 배치된 경찰에 의해 계획대로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후 1시30분경, 전태일 열사는
스스로 근로기준법 책과 몸을 태우며,
평화시장 앞길에서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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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사건 다음날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7면 기사입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2살이었습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이후 실현되는 듯 보였습니다.

 

3.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이를 계기로 많은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시작합니다.

그의 동료들이 만든 청계피복노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2천5백여 개에 달하는 노조가 만들어집니다.

또한, 학생과 지식인들이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됩니다.

그의 사망 사흘 뒤인 11월 16일,
대학가에서는 서울대를 시작으로 단식투쟁과 시위가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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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사태 확산을 우려한 정부가
시신을 사이에 두고 노동자들과 치열한 공방을 벌여,
11월 18일에야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결국, 당시 정권은 노동조건 개선과 노조 설립 등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1년 후, 지켜질 것만 같았던 그의 마지막 말은
끝내 지켜지지 않습니다.

1971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위법’은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강압적으로 막아
노동운동을 일체 금합니다.

 

그래서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노동자들은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으로
하루 15시간이 넘는 노동을 강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정당한 노동의 대가 대신,
‘선성장 후분배’라는 미명 아래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노동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면
개인의 안위만을 찾는 이기적인 존재가 돼야 했습니다.

2016년 현재,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여전히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손가락질 받습니다.

그래서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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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그날들> 장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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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낮은 곳, 더 소외된 곳, 더 정치적인 곳을 찾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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