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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들 11화] 박정희의 ‘유신체제’ 그리고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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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케이티>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명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당시 정권은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유신을 반대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이는, 목숨을 담보하지 않고서는
정권의 부당함을 지적할 수 없었던 당대의 실상이었습니다.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그날들>.
이번에는 유신체제가 선포된 이후 벌어진 사건들에 집중했습니다.

 

1. 김대중 납치사건

1972년 10월 17일, 유신을 선포한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를 ‘통일사업’이라고 선전합니다.

당시 정부가 내놓은 ’10월 유신’ 홍보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왜곡 선전에도
유신체제 반대 움직임들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듬 해 8월 8일, ‘반유신시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일명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집니다.

유신체제 선포 후,
해외에서 반유신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그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가
129시간 만에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납니다.

사건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고 김 전 대통령의 당시 모습입니다.

이후,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소행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각계각층에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움직임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2. 서울대 문리대 첫 시위

같은 해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첫 시위가 벌어진 당시 모습입니다.

대학생 500여 명이 집결했으나,
곧바로 투입된 경찰에 의해 180여 명이 연행됩니다.

이 시위는 당시 동아일보에서 보도했지만,
검열로 통제당하고 기사는 삭제됩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시위의 기폭제가 된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3. 최종길 사건

같은 달 19일, 당시 변사체로 발견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입니다.

당시 최 교수는 간부교수 회의에서,
“교수들이 시위에서 학생들 편에 설 것”과
“정부의 학생 처벌 명령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등의
소신 발언을 합니다.

이후, ‘유럽 간첩단 사건’ 수사 협조를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자진출두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출두 후 사흘 만에,
중정은 최 교수가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합니다.

하지만 투신 자살을 입증할 증거가 없었고,
검시에 유가족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등 의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후, 의문사위를 통해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사망했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4. 시국선언, 각계각층 시위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형태의 시위가 계속해서 벌어집니다.

다음 달인 11월에는 재야인사들이 모여 ‘시국 선언’을 발표합니다.

기자들은 기사 검열을 반대하는 철야농성을 벌입니다.

대학생들은 거리에서 투석전을 벌이고,
교수들은 집단 삭발식을 단행하기도 합니다.

이에, 정부는 강압적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언론을 단속합니다.

또, 전국 대학에 석유파동을 이유로 조기방학을 하도록 조치합니다.

하지만 다음 달인 12월에도 시위는 계속됩니다.

당시, 여대생들이 검은 리본을 달고 시위하는 모습입니다.

고등학생도 시위에 참가하는 등 양상이 커지자
결국 정부는 12월 4일, 고등학교에도 조기방학 조치를 내립니다.

역시, 석유파동이 그 이유였습니다.

 

5. 헌법개정 100만인 청원운동

그리고 같은 달 24일, 재야인사 30명이 서울 YMCA회관에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합니다.

당시 ‘100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고 장준하 선생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이 모든 사태는 민주주의만 회복되면 해결되는 일이다.
경제 파탄, 민심 혼란, 남북 긴장의 재현이란 상황에서
학생과 시민, 언론과 종교계가 거리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를
정부는 간과하지 말라. 앞으로 서명인 100만인이 될 때까지
개헌 청원운동을 전개하겠다.”

이틀 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개헌운동을 즉각 중단하라”며,
2시간에 걸친 특별연설을 발표합니다.

그럼에도 서명운동이 계속되자,
같은 달 29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청원운동을 중단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고에도 서명운동은 계속돼,
불과 2주 사이에 10만 여 명이 서명을 합니다.

결국 이듬 해인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가 발동됩니다.

 

‘유신체제’에서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민중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유일했습니다.

거리로 나오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안보를 내세워 자유를 억압했던 시대에서,
이처럼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최후의 보루’.

당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유와 안보에 대한 인터뷰’로 클로징을 갈음합니다.

<그날들> 장부경입니다.

※ THE아이엠피터 43회 전체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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