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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들 2화] 전두환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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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 기억나십니까?

80년대 당시 뉴스는 ‘땡’소리 후 어김없이 “전두환 대통령”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이후 언론은 ‘땡전뉴스’라는 조롱섞인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쿠데타 정권’이라는 딱지를 떼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언론을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이번에는 회고록 출간을 앞두고,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의 발포 명령 책임을 부인했습니다.

당시에는 ‘언론 통제’로, 이제는 ‘회고록’을 통해 그가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그날들>.

이번에는 전두환, 그가 군인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일들에 집중했습니다.

 

1. 하나회와 12.12 쿠데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격, 사망한 ‘10.26사태’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며 권력에 공백이 생깁니다.

이에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은 ‘하나회’를 견제하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12월13일자로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발령내려 합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생들이 주도해 1963년 비밀리에 결성된 조직인 ‘하나회’.

전두환, 그가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군내 주요 직책을 독식했던 이 ‘하나회’의 수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내용이 누설돼, 전두환을 필두로 한 육사 11, 12기생들은 발령 전날인 12일,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재가없이 정승화 총장을 강제연행합니다.

결국, 다음날 새벽 ‘12.12 쿠데타’에 굴복한 최규하 대통령의 최종 서명으로, 정승화 총장이 체포됩니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당시 ‘하나회’ 회원들입니다.

쿠데타에 참여하거나 이를 비호한 일부 장성들은 이후 ‘신군부’로 불리며 군의 요직에 오르고,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합니다.

 

2. 5.17 쿠데타

이에 전국에서는 계엄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울의 봄’, 일명 ‘민주화의 봄’ 시위가 이어집니다.

1980년 5월17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북한 남침설’을 내세워, 군 병력으로 국회를 장악하고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합니다.

이 ‘5.17조치’에 따라 전국에 2만여명의 계엄군이 배치됩니다.

그 중 계엄군 병력의 무려 93%가 주요 대학에 투입됩니다.

결국 ‘북한군’이 아닌, ‘신군부에 반대하는 학생과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군부는 또 다시 ‘5.17 조치’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18일 0시를 기점으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결국 ‘서울의 봄’은 전국에 계엄군이 투입되며 끝납니다.

 

3. 5.18 민주화운동(18~20일)

하지만 ‘광주’는 달랐습니다.

5월18일 광주 전남대 부근에 계엄군이 투입된 모습입니다.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계엄군은 무자비한 진압을 감행합니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로,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되는 당시 모습입니다.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군의 발포’가 산발적이고 돌발적이었습니다.

 

4. 첫 발포부터 진압까지(21~27일)

하지만, 21일 도청 앞 발포는 달랐습니다.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공수부대의 사격이 일제히 시작됩니다.

명령에 따른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집단발폽니다.

오후 1시 금남로에서 시작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는 오후 4시까지 이어져,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부상을 당합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신군부.

하지만 군의 모든 기록은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최초로 등장하는 무기탈취 사례는 21일 오후 1시 35분경 전남 화순파출소 사건입니다.

집단발포가 일어날 당시, 시민들은 총이 없었습니다.

이후 광주시민들은 전남도청을 목숨걸고 지킵니다.

하지만 27일 새벽 4시경, 도청 진압을 시작한 계엄군에 의해 1시간여 만에 ‘5.18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신군부의 핵심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후 나란히 11, 12대와 13대 대통령이 됩니다.

 

5. 5공 청문회

1988년, 제5공화국의 비리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제5공화국 청문회’가 열립니다.

12월31일 증인자격으로 청문회에 출석한 전 전 대통령입니다.

증인출석을 거부하다 여야 의원들의 끈길긴 요구로 자리에 나온 그는, 증인 선서없이 준비해온 발표문만 읽습니다.

1993년 12월3일,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을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합니다.

이어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1996년 ‘전두환, 노태우관련사건’ 공판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1997년 대법원 판결에서, “12.12사건은 명백한 군사반란”이며 “5.17사건과 5.18사건은 내란·내란목적살인 행위였다”고 결론납니다.

이후 광주항쟁은 공식 명칭이 ‘5.18 민주화운동’으로 통일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됩니다.

 

그리고 지난 19일자 한겨레 신문 1면입니다.

“전두환 ‘광주 발포 결정’ 회의 참석”이라는 제목과 함께 당시 전 전 대통령이 계엄군 집단발포의 책임자임이 명시된 또 하나의 자료가 공개됐습니다.

<그날들> 장부경입니다.

※ THE아이엠피터 32회 전체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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